주)우리신문 최정옥 기자 | 중국의 기술 굴기 시계가 빨라지며 우리나라에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다행히 딥시크발 인공지능(AI) 혁신을 통해 국가 미래를 좌우할 첨단 기술 확보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국내 당국·업계가 AI 전쟁에서 결의를 다시 다지고 '호랑이 등'에 올라타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멀게만 느껴졌던 '소버린 AI' 개발…"딥시크가 힌트 줬다"
2일 AI 업계의 반응을 종합하면 지난 설 연휴 이른바 '딥시크 충격'이 강타하기 전 국내 AI 개발업계의 분위기는 패배 의식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 모델·서비스의 성패가 투자를 감행한 컴퓨팅 파워의 양에 절대적으로 비례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여서, 하루가 다르게 천문학적 자본금 투자를 발표하는 미국 빅테크에 비교하면 국내 AI 투자 규모는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컴퓨팅 파워를 좌우하는 고사양 그래픽처리장치(GPU)의 국내 보유 개수가 2천개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당국이 향후 수년간 최대 2조5천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같은 날 미국이 발표한 AI 프로젝트 '스타게이트'의 규모는 300배에 달하는 718조원(약 5천억달러)으로 비교조차 어려워 보였다.
추종을 불허하는 듯한 미국발 '쩐의 전쟁' 속 국내 대표 AI 주자인 네이버는 AI 파운데이션 모델 '하이퍼클로바'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하이퍼클로바X'를 재작년 공개한 이후 획기적인 업그레이드 소식을 전하지 못했고, 카카오[035720] 역시 AI 역량에서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AI 스타트업들 역시 오픈AI의 GPT 모델이나 메타의 오픈소스 모델을 활용해 고만고만해 보이는 문서 작성, 통번역 서비스 등을 내놨을 뿐 국내에서 획기적인 AI 모델이 나왔다는 소식은 좀체 듣기 어려웠다.
'역시 미국 빅테크와 경쟁은 안 되는 것'이라는 좌절감 속에 외국산 AI 파운데이션 모델에 의존하지 않는 '소버린 AI'의 개발 의지가 희미해져 갈 무렵 딥시크가 등장했다.
딥시크가 추론 모델 R1의 전 모델인 V3 개발에 썼다고 밝힌 약 80억원(557만6천달러)에 초기 AI 모델 개발 비용을 포함하지 않은 점, 엔비디아의 저가형 GPU H800이 아니라 H100을 몰래 빼돌려 썼다는 의혹 등이 존재하지만, 대중에 공개한 R1 모델의 성능과 가성비 자체는 인정받고 있다.
국내 AI 업계가 더는 '인프라가 모자라 AI 모델 개발에 한계가 있다'고 한탄만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딥시크 모델에 사용된 코드가 오픈 소스로 일반에 공개되면서 누구나 재빠르게 알고리즘을 파악하면 더 빼어난 AI 모델이나 서비스로 진화시킬 수 있게 된 것도 국내 AI 업계의 희소식이다.
이를 방증하듯 설 연휴가 끝난 지난 31일 코난테크놀로지[402030], 솔트룩스[304100], 네이버 등 국내 AI 소프트웨어 업계 주가가 일제히 상승했다.

국내 AI 개발 기업 업스테이지에 몸담았던 박찬준 고려대 정보대학 AI 연구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R1에 활용된 기술은 기존의 AI 학습 패러다임과 다르다. 국내 기업도 그런 핵심 패러다임 자체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그간 국내 AI 업계는 오픈AI나 메타, 미스트랄 등 해외에서 개발한 AI 모델을 따라가는 수준이었는데, 우리도 기술적으로 선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딥시크 출현으로 빅테크가 자본력으로 구축해 오던 진입장벽이 해소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국내 AI 업계가 자신감을 갖고 기술 개발에 도전할 수 있게 된 힌트를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제본스 역설' 따라 빨라질 AI전쟁 시계…"혁신 도전 기업에 투자를"
딥시크 현상이 '제본스 역설'을 입증하며 전 세계 AI 경쟁이 더욱 빠르게 확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 업계·당국이 국가 전략 자원으로서 AI 기술력 개발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제본스 역설은 효율성 향상으로 자원을 적게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요와 소비 증가를 불러와 자원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고 주장한 영국 경제학자의 이름을 딴 가설이다.
딥시크가 시작한 AI 효율화로 더 많은 컴퓨팅 자원이 요구되고 발전된 AI 기술은 사회 곳곳에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고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 등이 이 가설을 인용해 예상한다.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산업계 및 국방력, 항공우주 경쟁 등 국가 명운이 달린 분야에서 첨단 AI 기술이 널리 사용될 것이란 이야기로, 핵심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AI 당국은 딥시크의 출현에도 반도체 인프라 경쟁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국가 AI 컴퓨팅센터 건립 등 국내 업계의 소버린 AI 개발 역량을 지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당국은 연휴 이후 딥시크 여파가 국내 AI 경쟁력에 미칠 여파를 분석하며 전략을 재정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상식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단일대오를 형성해 모든 투자 재원이나 보조금, 인력 등을 첨단산업에 몰아줄 수 있다"며 "한국이 할 수 있는 건 선택과 집중으로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더 많은 지원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장 원장은 "아울러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기업 입장이 아니라 혁신을 위해 도전하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투자하고 지원해 이들 기업이 성공해 돈을 벌고 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딥시크 여파에 대해 "엔비디아 진영은 충격을 받겠지만, AI 관련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기업에는 자극이 되면서 전체 AI 산업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긍정적 기회가 될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 역시 AI 관련 기술 개발에 참전할 수 있어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시스템반도체 개발 업체나 메모리 쪽도 다양한 개발자들이 참전하면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우리 반도체 업계에도 순풍이 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