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우리신문 신승관 기자 | "한국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한국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인 A(35)씨는 '세계 난민의 날'(6월 20일)을 이틀 앞둔 지난 1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목이 멘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러시아 특수부대에서 3년간 복무한 A씨는 우크라이나 전쟁 징집에 거부해 2022년 10월 한국에 왔다. 러시아와 무비자 협정을 체결한 데다 경제와 민주주의가 모두 발달한 국가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A씨는 올해 2월 옥중 의문사한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지지자였다. A씨는 러시아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가 여러 차례 체포돼 구타당하기도 했다.
A씨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형제 국가인데 서로 총을 겨눠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이 전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 겨우 입국했으나 법무부가 난민 심사를 거부하면서 A씨는 4개월 넘게 인천공항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A씨는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으나 법무부의 항소 등으로 심사가 미뤄지고 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한국 정부로부터 취업활동 허가, 의료 지원,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부여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아직 제대로 된 심사도 받지 못한 A씨는 6개월간 일자리 없이 헤맨 끝에 현재는 지방의 한 조선소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몸에 이상이 생겼지만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해 비싼 치료비를 감당하고 있다. 신분을 증명할 서류도 마땅치 않아 휴대전화 개설도 쉽지 않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다가 전쟁이 끝나면 고국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게 그의 유일한 꿈이다.
현행 난민법은 인종·종교·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난민으로 인정하도록 규정한다.
이런데도 법무부가 A씨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데 신중한 이유는 그가 외견상 강제징집을 피해 한국에 온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 역시 이런 경우는 난민 인정의 배경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법무부는 지난해 3월 A씨가 낸 소송의 1심 판결에 항소하며 "향후 유사한 난민 신청 사례가 속출하고 국경 관리 기능에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내에 난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만종 호원대 법경찰학부 명예교수는 "난민 문제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국내 안보와 치안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난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맞선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러시아 국적자는 5천750명으로 전년(1천38명)의 5.5배에 달한다.
지난달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해 징집을 거부한 러시아인의 난민 지위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으나 이 또한 운이 좋은 사례라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이 러시아인은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러시아 지인들 명의의 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했다고 한다.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의 이용석 활동가는 "한국 정부는 난민심사에서 증거를 과도하게 요구한다"며 "전쟁 중인 국가에서 탈출하면서 한국 난민 심사까지 생각해 증거를 모두 수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A씨를 대리하는 이종찬 변호사는 "전투를 거부한 군인을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한 러시아에서 반인도적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이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