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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키시마호 1] 우키시마호폭침사건 개요

일본은 끝까지 악마였다
꿈으로 끝난 귀향의 꿈

 

 

난징대학살에 대해선 국민의 80%가 알고있지만 우키시마호에 대해선 국민 7%정도만 알고있다 한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다.   (편집자 주)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1945년 8월 15일 일왕 미치노미야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에 굴복•수락하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그 지독했던 일제의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았다. 한반도 삼천리강산은 물론이고 일본 본토와 태평양전쟁터로 강제연행 되었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에 넘쳐 그 감개무량함이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이때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광복을 맞이한 한국인의 수가 1만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대본영 해군성의 지령과 전쟁터에서 한국인을 으레 죽여 왔던 일본군이 직접 자행한 『조선인섬멸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 『조선인섬멸작전』의 통제권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총지휘권을 쥔 우가키였고, 우가키는 대본영의 해군성 지령에 따른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해군성 역시 대본영 군통수권자의 명령 없이는 그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결국 오미나토항에서 우키시마호 출항 최종명령은 오미나토해군사령부 사령관인 우가키 해군 중장이 내렸다. 당시 사령관 차석이었던 참모장 가노메젠스케鹿目善輔 해군 소장은 우키시마호가 출항하기 전에 도쿄로 출장 가 있어 오미나토에는 없었다. 따라서 업무의 책임 서열은 군통수권자인 대본영의 히로히토가 주범이고 우가키에 이어 주석참모인 나카다 시게모토 해군 대좌이다. 그렇다해고 가노메젠스키가 도쿄로 출장갔다는 것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 관할구역의 전황에 대해 대본영에 보고하라는 조치였을 것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8월 9일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사할린에서부터 홋카이도와 일본 본토를 향해 진군해 내려오는 소련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다민족국가였던 소련의 군인 가운데 황색인종이 다수 있어 이를 한국인이 소련군을 안내하는 스파이라고 단정하고 한국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일왕의 항복 방송이 대본영에서 흘러나간 뒤에 퇴각하던 일본 해군들이 저지른 사할린 가미시스카경찰서 화염학살과 미즈호항

냉동학살 그리고 마이즈루만 수장학살로 이어졌다.

 

 

이름하여 《우키시마호폭침사건》

 

이 잔인무도한 학살 만행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77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인섬멸작전』 지령을 받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사령관 우가키와 주석참모인 나카다와 우키시마호 함장 도리우미 가네오는 부하들과 함께 3일 동안 거룻배 수 척을 이용하여 한국인을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그리고 하루 밤낮을 이유도 밝히지 아니한 채 바다 위에 띄워뒀다가 8월 22일 밤 10시가 돼서야 오미나토 앞바다인 무츠만을 빠져 나섰다.

 

이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 특설함대로 대본영의 지령에 따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홋카이도 하코다테항과 치시마를 오가며 군수품 수송과 츠가루해협의 제공•제해권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배는 일제 패망 직후 시모키타반도에 있는 “한국인 송환”이라는 마지막 임무를 띠는듯하였으나 사실은 인간학살선이었다. 일본의 북방지역 사할린과 쿠릴열도, 홋카이도의 산간 도로공사장과 탄광 그리고 남태평양과 동남아 전선에서 으레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고 학살해 온 것처럼 말이다.

 

일본 본토의 북방지역인 사할린이나 쿠릴열도,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시모키타반도의 군사시설 노역장은 더없이 참혹했고, 고문과 치사는 일상 있는 일이었다. 이런 점으로 광복을 맞은 한국인들은 우키시마호를 타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를 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말하기를 한국인 귀국선 우키시마호에는 9천500명 이상의 한국인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초기에서 일제 패전 직전까지 시모키타반도와 그 주변지역 해군전용비행장 등의 군사시설에 투입되었던 징용•징병 노동자, 자유노동자, 일반노무자, 외지 유입자, 가족생활자들이었다.

 

이 배는 오미나토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었으나 애초부터 부산을 향하는 직항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교토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서서 멈춰선 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마스트만 남기고 선체 모두 바닷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면서 8천여 명의 우리 국민이 죽었다. 그날이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쯤이다.

 

이 사건의 핵심 사안인 사망자 수는 77년이 지난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나 침몰 원인에 대해해서 2003년에는 남과 북 그리고 재일동포가 참가한 평양토론회에서 계획적 고의적 폭파 침몰로 결론을 내렸고, 2015년 8월 5일 부산 국제세미나에서도 폭발물 장치에 의한 자폭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공할 자료조차도 남기지 아니하고 폐기했거나 소각했다. 하지만 남측의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와 북측의 조선 일본군《위안부》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평양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그리고 일본의 교토조선인역사조사회와 도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2003년 9월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사건의 진상과 제반 결론을 공유한 바 있다.

 

당시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인원수를 알려면 승선자 명부가 없으므로 승선자 수를 추산할 수밖에 없다. 사건의 발상지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벌어진 강제연행•강제노동 실태, 군사시설 규모, 군사시설에 참여한 토목건축업체와 일본통운주식회사, 국영기업 등의 고용 실태, 각 해군비행장에 투입한 한국인 수, 각 해군부대에 투입한 한국인 수, 8월 15일 이후에 홋카이도와 그 외 지역에서 오미나토로 이동한 한국인 수, 가족생활자 수가 조사되어야 한다. 진상규명회가 조사한바 미사와비행장 해군11, 12, 13, 14부대에 투입한 인원, 가바야마비행장에서 일한 10개 중대 규모 인원, 해군23부대에서 일한 인원, 2개 국영기업체와 11개 민간토건업체에서 일한 인원수만으로도 승선자 수가 최소 9천2백여 명을 뛰어넘는다.

 

 

또한 사할린에서 퇴각하던 해군이 자행한 한국인 학살, 대본영 송환계획에 앞선 시기에 안전항해가 보장되지 아니한 승선, 출항의 부당성, 마이즈루만으로 회항, 해군 승무원들의 모선 탈출, 갑작스런 굉음, 구조 태만, 사망자 수 축소•조작, GHQ의 조사 방기, 9년간 선체 수중방치로 인한 사체 유기, 77년 동안 외면해 온 일본 정부의 태도 등을 알아야 비로소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출항에 앞서 페인트를 칠해 배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부착했다는 증언이 오미나토 해군공작부 조기과에 근무하던 보일러공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8월 21일 승선을 완료하고 22일 오후 10시에 출항했다. 무츠만을 빠져나온 우키시마호는 애초부터 부산항을 향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해군승무원 대부분이 양주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의 소지품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승무원들은 한국인들에게 “너희들이 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이 물건을 주는 것이 어찌 아깝겠는가!”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워야 한다. 뒤에 폭탄도 많이 실었다.”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이 배는 가다가 어디론가 들어간다.”는 등의 수상쩍은 언행을 서슴없이 죄다 토해냈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항진해 들어갈 때 이미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고 입항했다. 그러나 이 배는 처음부터 부두 접안을 시도하지 아니하고 헤비지와 도오시마 사이 해상에서 멈춰 섰다. 배가 멈춘 뒤에 해군승무원들은 구명보트를 내려 타고 모선을 탈출했다. 해군승무원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뒤에 폭발소리가 났다.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음이 났고 배는 가운데부터 바다 속으로 꺾이면서 침몰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갑판 위에서 한국인을 구조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로프를 칼로 잘라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선실 출입구에 임시로 설치한 나무사다리가 부러져 선실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용솟음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기관실에서 유출된 중유로 바다는 온통 까맣게 덮였고, 중유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눈만 뒤룩거리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인근 어촌마을에서 여인들이 작은 거룻배를 몰고 구조에 나섰으나 그 배마저 뒤집힐까 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피하면서 겨우 한두 명씩 구조했다. 살아난 사람들은 밤길을 걸어 마이즈루 타히라해병단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날 밤 임시수용소 2층에서 또 한 번의 미증유의 폭발이 일어나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생존자들이 마이즈루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가족을 찾지 못했고 시신이 배 기름으로 덮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때 해군들은 시신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말뚝을 박고 묶어 맺다. 마을 사람들은 긴 장대와 갈퀴를 들고나와 바다에 떠 있는 가방과 보따리를 끌어내 속에 든 돈을 챙겼다. 참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아침 바다였다. 그들은 비겁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연유로 마을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어 고향마을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대참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침몰원인과 사망자 수를 조작하고 축소하여 발표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에서 조사•분석한 내용은 다음 호에 게재하겠다.

 

특히 주목해야 할 만행은 9년 뒤에 해저에 가라앉은 선체를 인양하고자 할 때 일•조우호협회에서 유해를 원형 그대로 인양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선체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인양했다. 이 같은 처사는 또 다시 사망자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고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다. 그나마 인양한 유해로서 남녀노소를 구별할 수 있었으나 이 또한 무시하고 유해를 합쳐 태워 9년 전에 발표한 524명이라는 숫자에 맞춰 나눠 담기에 급급했다. 또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7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두 눈을 딱 감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교만한 태도가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당시 시모키타반도 일대 토목공사장, 가마부세산 요새화와 지하군수공장, 가바야마비행장, 미사와비행장, 오마철도, 오미나토항만 등의 공사와 군수물자 상하역과 운송 등이 모두 전쟁수단이었다. 이 같은 공사장에 대본영은 한국인 9천 명을 투입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1945년 8월 초까지 우리 국민을 강제연행하여 이 지역 공사장에 투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침몰 당시 살아나온 생존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강제연행에서 강제노동 그리고 우키시마호 폭파 침몰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원고단을 구성하여 교토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어느 분은 네 번째 끌려갔고, 어느 분은 홋카이도에서 일하다가 형제가 노동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배가 폭파 침몰된 마이즈루만 현장에서 남편, 아내, 딸, 아들, 어머니, 누나, 언니, 동생, 삼촌을 잃었다. 마이즈루 바다에서는 물을 담은 바가지에 개미를 한 움큼 넣은 것처럼 바글거리며 죽어갔다고 했다. 당시 해군승무원도 사건 자체를 시인했으며 한일 양국 정부도 다 알고 있으며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어쨌든지 우키시마호를 폭파 침몰시키는 수법으로 된 『조선인섬멸작전』이 대본영의 지시냐 아니면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단독소행이냐 아니면 퇴각하던 항명파 해군들의 일왕에 대한 맹종성 난동이냐를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망자의 인권과 직결되어 있으며 현재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키시마호는 참혹하게 침몰당한 뒤 7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적지였던 부산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한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참상과 일본의 침략전쟁이 빚어낸 『조선인섬멸작전』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 이 사건의 책임 소재는 가해국인 일본이 가장 원천적인 책임이 있다. 한국 정부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1965년 한일협정 때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 진상을 규명하여 해결해야 했으나 그러하지 아니한 책임이 있다.

 

미국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미국은 연합군총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와 함께 A전범인 히로히토를 처형하지 않으려고 경신년간도대참살, 관동대지진학살만행, 난징대학살, 일본관동군731부대인간생체실험, 한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 일본군세계여성성폭행 군위안소 운영실태, 아시아대규모약탈, 외국양민계획적대량학살 등을 국제전범재판소에 제소회부하지 아니하여 지금도 제소가 되지 않고 있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사건이 바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 따라서 GHQ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와 미국이 주도한 대일본 전후처리를 원점으로 돌려 철저하게 조사•공개•처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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