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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기자가 간다

60년 이어온 오기와 정성…국내 유일 '삽자루' 장인

수입산 밀려 힘겨운 밥벌이…25가지 공정 거쳐 옹골찬 제품 제작
무역회사 관두고 가업 이은 아들…판로 개척·홍보 고군분투
"소상공인 살아야…조달청 입찰도 못 해 정부·지자체 관심·지원 필요"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국내 유일한 삽자루 공장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값싼 중국산 삽자루에 밀려 전기세도 못 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어요. 수입산을 국산으로 내다 팔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렇게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정말 오기로 버텼어요."

 

강원 원주에는 73년 인생 가운데 60년을 '삽자루'와 함께 한 장인이 있다.

 

유병태(73)씨의 인생은 그야말로 삽자루의 흥망성쇠와 역사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삽자루가 발전의 상징물이었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시기부터 공사·농사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금까지 유씨의 삽자루 인생도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약 20년 전부터는 국내에 수입산 삽자루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공장이 하나둘씩 문을 닫아 이제는 유씨 공장이 전국에서 유일한 국산 삽자루 공장으로 어렵사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르는 이들은 '삽자루 만드는 게 어려울 게 있냐'고 하지만, 무려 25가지 과정을 거쳐야만 삽날을 견고히 지탱할 자루가 완성된다.

 

원목에 옹이 나고 터지거나 삭기라도 하면 몽땅 버려야 하기 때문에 참나무 고르는 과정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고, 홈이 1㎝라도 어긋나거나 사포질이 잘못되면 다시 만들어야 해 모든 공정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유씨가 삽자루를 볼 때마다 자식처럼 소중한 감정이 드는 이유다.

 

시작은 밥벌이였다. 그저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됐다.

 

"하도 가난해 돈 좀 벌려고 10대 때부터 대전 삽자루 공장에서 숙식하며 기술을 배웠어요. 기술자가 되니 충북 영동이나 강원 춘천 공장에서도 저를 불러주더라고요. 그렇게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제 공장을 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는 않았다. 원목이 많이 나는 강릉 대관령과 가까워 조달이 쉬우면서도 수급이 좋은 위치를 찾다 보니 원주만 한 곳이 없었다. 그가 원주에 공장 터를 잡게 된 이유다.

 

그렇게 1995년 원주에 공장을 차려 운영을 시작했지만 아뿔싸, 중국산 삽이 물밀듯이 국내에 들어왔다.

 

제품의 질은 둘째 치고, 값싼 가격에 중국산 삽이 금세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다.

 

자연스레 유씨 공장에도 거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1년 치 원목을 보관해둔 야적장에는 나무가 꽉 차 있었다.

 

전기세를 못 낼 정도로 공장 형편이 어려워지자 종업원들이 먼저 "1년 정도 문을 닫고 쉬자"고 권유할 정도였다.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유씨는 오기로 버텼다.

 

 

다행히 소비자들 사이에서 국산과 달리 수입산은 잘 부러지고 튼튼하지 않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곳에 불과하던 거래처가 두 곳으로 늘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어도 불면의 밤은 계속됐다. 혼자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상황에 아들 유흥조(48)씨가 잘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가업을 잇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아들 흥조씨는 결국 2017년 2월 서울에서 원주로 이사를 왔다.

 

"아들이 내려왔을 때 '아버지, 제가 오기로 삽자루 공장 살릴게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마음에 너무 감동했어요. 남모르게 눈물도 흘렸고요."

 

아들과의 동업은 '동상이몽', 그 자체였다. 일을 알려주려고 하면 아들은 어디론가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하다 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일쑤였고, 40대 아들과 입씨름하는 날이 10대 사춘기 때보다도 잦았다.

 

"아버지는 저를 기술자로만 만들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와서 보니까 기술이 문제가 아니예요. 물건이 팔려야지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데, 납품만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공장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철물점에서도 이곳이 국산 삽자루 공장인지도 몰라요. 저희 브랜드가 없으니까 업체에서는 수입산과 저희 제품에 같은 브랜드 마크를 붙여 팔아요. 그러면 소비자들은 저희 게 좋은지 당연히 알 수가 없는 거죠."

 

공장 일에 소홀한 줄만 알았던 아들은 나름 판로를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흥조씨는 이들 공장만의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들고, 여러 플랫폼에서 이를 홍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 직장에서도 10여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냉혹했다.

 

공장을 살리겠다는 말과는 달리 흥조씨가 오고 난 뒤에는 공장 사정이 더 안 좋아졌다. 약 3년간 '최악'의 상황을 겪으며 흥조씨는 아내에게 3개월 동안 월급도 가져다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수입산 삽자루에 유씨 공장 브랜드를 찍어 팔라는 '못된' 제안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오랜 시간 지켜온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고민 없이 거절했다.

 

힘든 나날이 지속됐지만 흥조씨는 가업을 잇겠다고 다짐한 초심을 어떻게서든 지키고 싶었다.

 

"전 직장에 다닐 때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지는 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젠가는 공장 운영이 어려워지는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홀로 너무 고생하신 걸 알기에 서글펐어요. 저 역시나 삽자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국산 삽자루가 영영 사라진다고 상상하니 마음도 아팠고요."

 

 

그의 간절한 마음 덕이었을까. 언론에서 하나둘씩 국내 유일 삽자루 장인을 조명하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응원의 메시지가 잇따랐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공장을 직접 찾아오거나 새 제품 개발 소식에 물건을 보내달라는 시민들도 생겨 힘이 났다.

 

흥조씨는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 역시 가업을 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아들이 물려받았을 때는 일이 힘들기만 한 일이 아니라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토대를 마련해주고 싶다는 게 흥조씨의 목표다.

 

"저희 같은 소상공인이 있기 때문에 대기업도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무너지면 도미노 효과처럼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요. 저희 같은 경우에는 조달청 입찰도 못 해요. 조달 품목을 올리려면 최소 업체 3곳이 경쟁해야 하는데, 저희는 전국에 하나뿐이라 자격 자체가 되지 않아요. 수입산에 밀려 국내 업체와 종사자가 사라지지 않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리와 지원이 있었으면 해요."

 

뜨거운 여름날, 부자의 땀방울이 참나무 위로 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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