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신문 염진학 기자 | 1천50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 경리직원이 수억원대 관리비를 빼돌리고 잠적했다.
이 직원은 25년차 베테랑으로 인터넷뱅킹의 편리함과 감시의 허술함을 교묘히 이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11일 광주 광산구 소재 A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이 아파트에서 25년째 경리 직원으로 일하던 40대 B씨는 지난 5일부터 돌연 출근하지 않고 있다.
이날은 관리사무소 직원 월급을 지급해야 하는 날이어서 B씨 대신 다른 직원이 관리비 입출금 통장을 찾아봤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수상함을 느낀 관리사무소 측이 은행에 직접 찾아가 입출금 내역과 잔액을 확인해보니 통장에 남아있는 돈은 1원도 없었다.
별도 통장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줄 알았던 장기수선충당금 7억원도 온데간데 없었다.
이 아파트는 입주민에게 받은 관리비를 관리사무소가 직접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25년간 줄곧 관리비 출납 업무를 맡아온 B씨가 모두 빼돌렸다는 것을 이때 알아차렸다.
B씨는 인터넷뱅킹을 활용하기 시작한 2016년부터 10년 가까이 관리비에 손을 댄 것으로 관리사무소 측은 파악했다.
이전에는 매번 관리소장과 입주자대표회장의 도장을 찍어 승인받아야 했지만, 인터넷뱅킹을 활용하면서 출납 권한은 온전히 B씨에게 주어졌다.
그는 인터넷뱅킹 이체 시 '받는 사람' 이름을 손쉽게 변경할 수 있는 점을 노렸다.
관리비를 자신의 계좌로 이체하면서 마치 거래처에 보내거나 정상적인 사용처에 보낸 것처럼 통장 기록을 만들어 의심을 피했다.
300가구 이상 아파트단지의 경우 의무적으로 외부 회계감사를 받도록 한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이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B씨는 잔액 증명서 등 회계 자료·서류를 위조하거나 변조해 이러한 제도적 감시를 피한 것으로 파악됐다.
회계감사의 경우 전수 조사가 아닌 표본 조사가 많은 데다 제출된 서류를 근거로 이뤄지기 때문에 회계 담당자가 작정하고 꾸며놓은 서류는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탓이다.
업계 관계자는 "감사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전수 조사를 하긴 어렵다"며 "담당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속이려고 들면 감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지자체 역시 사유 재산에 대해 개입할 권한이 없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광주시 관계자는 "아파트는 사유재산이고 자치 관리기구를 통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행정기관이 직접 개입하긴 어렵다"며 "공동주택관리법을 위반한 경우 과태료 부과할 수 있지만 사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체 관리·감독 체계를 정비하거나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광산경찰서는 관리사무소 측이 B씨를 업무상 횡령 등 혐의로 고소하자 수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