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장의 인터뷰 기사는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 기사는 첫 번째로, 교제 폭력 중에서 생활 통제와 정서적 폭력을 주로 다뤘습니다. 다음에 나가는 두 번째 기사는 살인과 성폭력 등의 물리적 폭력, 그다음 주 초의 세 번째 기사는 구조적 문제와 해결 방안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성장기 스토리와 개인의 사생활, 개인 사진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편집자 주 |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너 같은 사람은 기생충이야", "너는 도대체 아이큐가 얼마냐",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냐", "너는 처맞아야 정신 차린다", "네 주제에 어디서 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니", "저번에 보니까 너의 부모도 가방끈이 짧은 것 같더라", "네가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뭘 제대로 배웠겠냐", "입술은 누굴 유혹하려고 진하게 칠했냐", "긴 치마도 안되고 바지만 입고 다녀라."
이는 교제 폭력 중 생활 통제와 정서적 폭력 내용들이다.
김도연(54)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장은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교제 폭력 가해자들은 심각한 수준의 모든 욕설을 다 한다"면서 "연인에게 10시간 동안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는 "욕설 문자가 하루에 200통은 기본이고 300∼400통에 이르기도 한다"면서 "부재중 전화도 수백통씩 쌓이니 피해자의 생활이 마비된다"고 했다.
김 소장은 "이런 생활 통제와 정서적 폭력이 나타나면 하지 말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고, 고쳐지지 않으면 빨리 헤어져야 한다"면서 "연인이 또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도 흔들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별 과정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고 전문가와 상담하는 게 좋다"면서 "생활 통제와 정서적 폭력 단계에서 빨리 헤어지지 못하면 살인을 포함한 물리적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1970년 인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한 김 소장은 대학 학부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14년 한국청소년자살예방협회를 창립해 정서적으로 힘든 청소년들을 도왔다. 2016년에는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를 만들어 교제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다.
고향은 어디인가.
▲ 인천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온 지 100일도 안 돼서 외할머니가 데리고 가서 키웠다. 외갓집도 인천에 있었다.
왜 외갓집에서 살았나.
▲ 어머니에게 우울증이 있었다. 사흘간 진통 끝에 출산하셨는데 병약한 상태에서 산후 우울증이 온 듯하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만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셨는데, 결국 그 기간이 나의 성장기 전체가 됐다. 남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성장기에 어머니를 자주 봤나.
▲ 엄마는 친정에 자주 오셔서 나를 보고 가시곤 했다. 나를 보러 올 때마다 잘해주셨다. 항상 칭찬해주시고, 어떤 말이든 경청해주셨다. 예쁜 옷과 신발을 사 오셨고, 사진도 많이 찍어줬다. 엄마와 떨어져 살아도 나는 중요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운동회를 비롯한 학교 행사에도 다른 일을 제쳐두고 오셨다. 작은 추억이라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실 때 같이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외갓집으로 왔으니 외할머니한테 단단하게 애착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직접 키우지 못해 많이 속상했을 듯하다.
▲ 엄마는 내가 부모와 떨어져 자라게 된 것에 대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20대로 성장한 나에게 엄마는 "너는 아픈 손가락이어서 더 애틋하고 사랑을 많이 주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장기에 아버지는 가끔 만났나.
▲ 아버지는 내성적인 분이었다. 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아빠가 밖에 와 있으니 나가보라'고 전해주곤 했다. 나가보면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나란히 앉아 있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자식을 만나면 다정한 말투로 "어떻게 지내느냐", "힘든 일은 없느냐"고 물어보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냥 가만히 옆에 앉아 계셨다. 나도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끔 선물을 주고 가셨는데 유난히 기억나는 것은 빨간 스케이트였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스케이트를 직접 신겨주시면서 지긋이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왜 처가에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딸을 만났나.
▲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결혼도 반대하셨다. 본인의 딸이 고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의 차남이었는데, 형제들이 많았기에 할머니가 그렇게 생각하신 듯하다. 어머니는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고 결혼했고, 그 결과는 할머니의 예상대로였다. 외가는 어머니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줘야 했다.
아버지가 경제력이 없었나.
▲ 아버지는 회사원이었는데, 월급을 받아도 친가에 도움을 줘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했고 술을 많이 드셨다. 이러니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결혼 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는 어떠했나.
▲ 어머니는 여리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시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잘해서 지자체가 주최하는 문학 행사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는 풍부한 사랑이 필요한 분인데,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외로움을 많이 느꼈고 힘들어하셨다.
외갓집의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외할머니 쪽으로 윗대부터 부자였다. 나는 성장기에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할머니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남동생이 "나도 누나처럼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 안 될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동생은 어린 마음에 나를 부러워한 것인데, 반대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두 분 모두 경찰관이었다. 외할머니는 외향적인 성향인 데다 리더십이 뛰어나서 퇴직 경찰관들의 친목 단체인 경우회(인천지역) 회장을 맡으셨다. 외할머니는 이 단체를 통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나를 데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늦가을에는 집 마당에 배추 수백 포기를 쌓아놓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김장했다. 동네의 취약 계층에 나눠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협업하고,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것을 배웠다. 여성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본인은 사람들을 돕는 심리 전문가가 됐는데,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하나.
▲ 중고교 학창 시절부터 나는 외로운 친구들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고민 상담도 많이 해줬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니 많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교제 폭력 피해자에 대한 상담과 지원은 이런 연장선에 있다.
교제 폭력이란 무엇인가.
▲ 교제 시작 단계, 교제 중, 이별 후에 발생하는 모든 폭력을 말한다. 심리적, 정서적, 언어적, 물리적, 경제적 폭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 대신에 갈수록 '교제 폭력'을 사용하는 추세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현재의 연인 또는 과거에 연인이었던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심각한 경우가 많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강도가 점점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성이 '데이트'라는 단어가 갖는 낭만적 이미지 때문에 희석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여성가족부와 경찰은 2022년부터 '데이트 폭력' 대신에 '교제 폭력'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나도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라는 명칭을 '한국교제폭력연구소'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연간 교제 폭력 신고 건수가 작년에 7만7천건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많이 일어나고 있나.
▲ 신고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교제 폭력은 연간 40만∼50만건 정도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하루에 1천건 정도다. 신고율은 20% 미만일 것으로 생각한다.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 가해자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보복을 당할 수도 있어서 신고를 꺼린다.
작년 교제 폭력 신고 건수는 2020년의 4만9천건보다 50% 증가했다고 하는데, 교제 폭력 자체가 늘어나고 있다고 봐야 하나.
▲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과거 보다 교제 폭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신고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비해 비혼과 미혼, 이혼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과거의 가정 폭력이 이제는 교제 폭력으로 분류되는 측면도 있다. 한편으로는 과거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욕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는데, 이는 교제 폭력이 늘어나는 요인이 될 수 있다.